메뉴 건너뛰기

문중소개

문중소개


忠州朴氏는 新羅 第54代 景明王의 다섯째 아들 彦昌(沙伐大君)의 後裔로 傳해지기도 하나 上系가 失傳되어 正確한 年代를 考證할 수 없다. 다만 新羅.. 始祖大王의 後孫 朴英이 高麗時代에 副正의 벼슬길에 오르면서 後孫들이“英”을 忠州朴氏 貫祖로 모시고 世系를 이루고있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原來 忠州는 高句麗때 國原省이었는데 新羅가 儒理王때 占領하여 眞興王 十八年에 와서는 小京으로 定하고 다음해인 西紀 五五八年에 貴戚子弟들과 六府豪民들을 이곳에 옮겨 다스리게 하였는데 그 後後孫들은 累代에 걸쳐 이곳에 살면서 祖上들이 定着 世居해온 忠州를 本貫으로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忠州朴氏의 確實한 系譜는 成宗五年 甲午年(西紀 一四七四年)에 僉正 朴原昌이 처음으로 修譜하였는데 高麗 副正朴英을 貫祖로 定하고 “後에 더 아는 學者를 기다린다”는 但書를 남겼으나 朴氏가 忠州(忠原. 中原)에 世居한지

一千四百餘年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이를 考證할만한 歷史的 資料가 없으니 애달픈 일이다.

 

現存하는 資料도 相異하여 信憑性이 稀薄한 바 慶北 尙州市 沙伐面 化達里 둔진산 沙伐君의 墓所옆 神道碑에는

沙伐君이 景明王의 둘째아들로 撰述되었으나 慶州五陵 崇德殿에 있는 始祖 王陵 碑銘에는 沙伐君이 景明王때

八公子中 다섯째로 撰述되어 있으니 그 하나의 例가 된다.


또한 僉正 朴原昌의 成化譜 以來 辛卯, 甲戌筆譜, 前甲申, 後甲申, 庚辰, 의 세보를 編慕하였다. 그후 一九七二年

(壬子)에 參議公 派譜를 하였는데 보다 充實한 보다 나은 族譜 編纂의 努力으로 “副正公 始祖를 始祖王始祖로 하고準尙州朴氏譜諜하여 沙伐王子 諱昱이오 其子下七代失諱後에 八傳而有諱甄이오 九傳而有諱元挺 十傳而有諱英으로 校正하여 昭穆을 辨證하고 委員會에 붙이여 合議一致 되었음으로 不顧贊越하고 위와같이 辨證하니 두려워 마지 않는다”라고 한 先系의 그릇된 考察로 看做하는 多少의 混沌을 惹起하였음은 否認할 수 없다.

 

忠州朴氏의 先祖 朴原昌이 우리나라 族譜史上 처음으로 修譜한 成化譜에 따라 英을 貫祖로 世系를 이루고 있음을分明히 한다.


그後 英의 아들 臣이 高麗때 檢校神虎衛大將軍을 지냈으며 孫子 元崇은 三司右使를 歷任하고 僉議評理를 지낸

아들 得升과 함께 家勢를 일으켰다.

 

高麗末에 와서는 權臣 林堅味의 橫暴를 彈劾했던 八世孫 光理가 開城少尹을 歷任, 司僕寺正에 贈職되었다.

司憲府監察을 거쳐 鎭海 稷山 監務를 지냈던 蓁과 殷山郡事를 歷任한 蘇兄弟가 어지러운 政局을 避하여 忠淸道 德津縣 가장골로 隱居하여 살게 되어 이로서 忠州朴氏의 世居地를 이루게 되었고, 道洞의 追遠祠에는 貫祖와 以下七世의 位牌를 모시고 있다.

 

八世의 墓所는 開城 東門밖에 모셨는데 不幸이 確認할 수 없어 恨歎스러운 일이지만 그곳에는 確實한 歷史的 事實이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貫祖 英의 九世孫 參議公이 四兄弟를 두니 孝諴, 忠諴, 悌諴, 信諴으로 그 後孫들이 大田一圓, 堤川, 永同一圓, 群山, 連山, 公州, 恩津, 長水, 龍安, 廬山, 羅州, 始興, 龍仁, 洪城, 錦山, 淸州, 開城, 光州 등지에 集城村 을 이루고 있으며 弟 判書公이 五兄弟를 두니 仁興, 義興, 禮興, 智興. 信興이며 그 後孫들은 懷德, 洪原, 淸津, 孟山, 光州, 松亭, 羅州, 高敞, 古阜, 寶城 等地에서 集成村을 이루고 있다.

 

忠州朴氏는 家傳忠孝, 世守敦睦의 家訓을 六百餘年間 지켜오면서 道學文章과 忠孝節義를 代代로 輩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로